이인식 기자의 여행이야기 로마 북쪽으로 약 310 km 떨어진 움브리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아씨시(Assisi)에 있는 성프란체스코 성당은 프란체스코 종파의 창시자인 성 프란체스코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성 프란체스코는 이 곳 아씨시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후에 회개하여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이 성당은 그가 죽은지 2년 후인 1228년에 착공하여 1253년에 완성되었으며, 비탈이 많은 지형을 살려 상하 두 쌍으로 된 진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는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항상 끊이지 않고 있다. 1226년 그가 죽은 이후로 피렌체와 시에나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아씨시로 몰려 들었으며, 그들은 뛰어난 벽화와 프레스코화를 남기고 갔다. /편집자 주 성 프란체스코(St Fransico)의 탄생지로 알려진 아씨시(Assisi)는 카톨릭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필자는 지난 8월9일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오전 7시58분 성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모셔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Basilica di S. Francesco)`이 있는 아씨시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한적한 시골 철길을 달리고 또 달리길 1시간 30분만에 도착했다. Trevi라는 작은 역을 지나자 산 위에 군락을 이룬 마을들이 띄엄 띄엄 보이기 시작한다. Spello를 지나 곧 Assisi다. 중세에 지어진 성곽 안에 군락을 이룬 이 두 마을의 외관은 서로 닮아 있어 이 곳들이 각각 영주의 지배하에 번영을 누렸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아씨시는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이며 그가 귀족으로서 청년시절을 보내고 패잔병으로 고개를 떨군채 돌아와 신앙을 체험하고 실현화 시킨곳이다. 작은 형제회의 본원지이며 St Clara(글라라 성녀)가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정신을 이어받아 설립한 글라라수도회의 본원지이기도 하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함께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은 성지로 지금도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곳이다. 기차역 앞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천국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언덕에 자리잡은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향했다. 작은 예수라 불리우는 성인 프란체스코에 대해 더 알아본다. 1226년 10월 3일, 그리스도교 역사상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성인이라 추앙받는 성(聖) 프란체스코가 선종했다. 그는 1182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주 고대도시 아씨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포목상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허랑방탕했다. 쾌락에 몰두하다 곧 허무와 좌절을 느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러다 18세 되던 해 이웃 도시 페루자와 전쟁이 터지자 참전하지만 포로로 잡히고 중병까지 걸려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가 27세이던 1209년 성 메사아의 날인 2월24일 프란체스코는 `포르지운콜라`라는 작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던 중 그리스도가 그의 사도들에게 가르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마태복은 10장의 글을 듣게 된다. 그는 그 가르침대로 즉석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자팡이와 지갑을 버렸으며, 한 벌 옷만 걸치고 끈으로 가죽 허리띠를 대신하였다. 허름한 갈색 농부 옷을 입고 가죽띠 대신 청빈(poverty), 순결(chastity), 순종(obedience)을 상징하는 세 겹의 밧줄을 허리에 두르고 성당들을 수리하며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된다. 이 소식은 그가 지나는 곳마다 퍼져 나갔다. 하나 둘 제자들이 생겼고 이는 자연스럽게 수도회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모태가 된 수도사들의 공동체 `작은 형제회(Ordo Fratum Minoram)`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1226년 사망할 때까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상층부에는 예배당이 있다. 또 벽을 빙 돌아 성화가 그려져 있다. 성전은 몹시 어둡고 조용하며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작은 속삭임도 허락지 않는 듯하다. 모두가 경건한 마음 가짐으로 눈을 들어 성화를 바라본다. 성화 속의 인물들은 눈빛 하나 손동작 하나까지 너무나 섬세했다. 많이 훼손 되었지만 벽에 가까이 눈을 맞추어 바라본 그것은 마치 툭 뛰어 나올 듯 생생하다. 또한 금색이 많이 들어간 입체적인 채색으로 수수해 보이는 그림의 내용을 더 신비하며 도드러지게 보여준다.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28장면으로 표현한 프레스코화는 지오토의 업적 중 하나이다. 움브리아 평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고된 일에 잠시 허리를 펴고 올려 보았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인구 2만여명의 이 작은 도시가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나고 죽어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는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카톨릭인들에게 중요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항상 끊이지 않고 있다. 바티칸의 화려한 종교예술보다 다 떨어지고 너덜 너덜한 프란체스코 성인의 한벌 옷이 더 넓은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주었다. 필자는 아씨시 마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성전의 경건함에 머리 숙였으며 성인의 남긴 흔적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성인의 흔적을 가슴 속에 담고서 아씨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로카 마죠레 요새`로 향했다. 이곳은 중세에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로서 움브리아 평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는 순간 살랑이는 바람에 잠시 뒤를 돌아보니 움브리아의 전원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달리 묘사할 방법이 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아씨시를 둘러싼 `로카 카죠레 요새`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백장미 빛깔 신비의 도시를 내려다 본다. 저 아래로 아이보리색 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이탈리아의 다른 성당과는 달리 밖으로 나있는 장식다운 장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이했다. 아마도 청빈을 최고로 여긴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좇기 위함이니라.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성프란체스코 성당은 프란체스코 성자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곳엔 그 어떤 화려함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꽃무늬 문양의 장식만이 성당을 꾸미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엔 한평생 꽃처럼 아름답게 살다간 성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청빈, 복종, 순결의 덕목으로 오직 한사람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했던 성인의 거룩한 삶은 오늘도 전세계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인의 향기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향기는 하나의 노래가 되어 널리 모든 사람들에게 불려진다. 그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 모든 만물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듯이.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엔 오밀조밀한 가게에 조각해 놓은 비누조각이 앙증맞게 예쁘고 조금 더 내려오는 길의 저택 주변길은 붉은 벽돌로 치장되어 있는데 너무나 호젓했고 주변 평원의 보리밭과 포도밭 그리고 농가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세가지 기적이 있는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내려오는 버스안에서 베로니카 윤이라는 한국인 최초 아씨시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문제가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그와 함께 20여분 걸어서 손 쉽게 세가지 기적이 있다는 성당안에 또 다른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모 성당`(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찾았다. 성 프란체스코가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빈곤한 삶을 선택한 후 머무르며 프란체스코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직접 지은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에 세워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복도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동상과 그곳에 오랫동안 대를 이어 둥지를 튼 한쌍의 하얀비들기를 만난다. 기적으로 여겨지며 많은 순례자들의 사랑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비둘기. 비둘기의 습성을 본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고 대를 이어 둥지를 트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연과의 조화, 생명의 고결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 만으로도 이 비둘기들이 진정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얌전하게 앉아있는 흰 비둘기 한 쌍이 수세기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성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수세기 동안 은은한 장미향이 풍긴다고 한다. 특히 그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일부러 가시에 온몸을 내던졌던 장미나무 덤불은 그의 몸이 상할까봐 날카로운 가시를 숨겼다고 하는데 지금도 바로 그 `가시 없는 장미`가 성당 정원에 남아있다. 특히 이곳 `포르치운콜라`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전대사-아씨시의 용서`가 행해지고 있어 발길이 항상 끊이지 않고 있다. 순백의 도시 속 좁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없는 죄까지도 낱낱이 고해성사를 하고 싶어질 지경(?)이 된다. 프란체스코의 혼이 살아있는 아씨시는 경건한 곳, 기도하는 곳, 가톨릭 성지로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글·사진 / 이인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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