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습니다. 아침, 새로운 지금 여기가 선물로 주어지면 다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사고들 밑바탕에 깔려있는 감정을 살펴봅니다. 감정을 의식의 강물에 흘려보내며 붙잡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소유하거나 만나는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것이다. 따라서 관계나 소유 때문에 분노할 필요가 없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며 보내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짜여진 틀 속에서 정해진 시간의 일정에 따라서 생활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간표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의 숙제로 만들어 간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 시간표를 한 번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공부하다가 친구가 놀러 오면 친구와 놀아야지 공부한다고 친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놀고 싶은데 해야 하는 다른 일이 있으면-대부분은 아버지를 돕는 농사이지만 그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험은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지내다 보면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일들의 대부분은 제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면서 저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저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필요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제게 필요한 일이 제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이 납니다. 몸은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정신적 자유를 체험하는 과정은 몸의 피로를 극복하게 만들고 몸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원하는 일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제게 필요한 일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도 한가지 원칙을 지킵니다. “계획은 내가 세우지만 결정은 하느님이 하신다.”
결정을 내리는 힘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고통 속으로 몰아 부칩니다. 스스로 사회의 구세주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한국 사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가 대자본가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 것처럼 난세가 영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웅이 난세를 만들었습니다. 영웅이 되려는 사람들은 힘을 영구히 소유하려는 의도를 지닌 사람들이고 그들이 지닌 힘의 결과는 난세입니다. 정의가 사라진 사랑이 판치는 세상, 정의가 결핍된 나눔이 대세인 세상이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애착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우친 소유가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됩니다.
세상은 영웅들에 의해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영웅은 영웅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성에 대한 보상심리로 나타나는 허상입니다. 세상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삶 속에서 때로는 비범함을 드러내는 “나”를 통해서 돌아갑니다. 수많은 “나”가 “우리”를 형성하면 세상은 변혁되고 진화합니다. 영웅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