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을 가면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르곤 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은 바라보고 있으면 즐겁고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은 그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상태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고, 타인과 맺은 관계형태에 따라서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이른바 비민주적인 정권과 독재정권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방해합니다. 그가 나와 어우러져 우리를 이룰 때, 드러나는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라는 말 대신에 개별적 개인에 대한 중요성을 더 부각시킵니다.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좋은 자원이 됩니다. 사다리 꼭대기에 앉아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다리 밖으로 밀어냅니다. 마치 스스로를 하늘의 옥좌에 앉아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는 하늘 아래입니다. 이론이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운동법칙입니다. 법칙과 논리에 따라서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관계라면 그 인간관계는 더 이상 인간관계가 아니라 기계적 조합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창조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창조성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운동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가 아니라, 이것은 무엇일까 혹은 저것은 무엇일까의 움직임으로 드러납니다. 법의 개입은 최소한의 개입이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해두고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창조성과 해야 할 것을 정해두고 그것만을 해야 하는 창조성의 결과는 다릅니다. 우리사회는 해야 하는 것을 정해 두고 그것만을 강요하는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현 정권이 주장하는 창조경제가 가능할까요? 구조는 그 속에서 삶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설계도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드러내는 설계도는 반복되는 억울한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 결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지 못하게 됩니다. 꽃보다 못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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