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산 육각정에 올라갑니다. 육각정에서 바라보는 청양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추수를 끝낸 논은 민머리를 드러내고 있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무들은 이전의 푸르름 대신에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채워진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청양 주변의 모든 산들과 들 그리고 천들은 이전의 빛을 벗어나 새로운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몸을 휘감고 떠나가는 바람의 손길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또다른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야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가끔 시간과 장소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제게 시간과 장소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장소는 육화가 실현되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채워져서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장소에서의 시간은 카이로스적입니다. 그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과 행위로 완성되어져 가는 시간입니다. 예수의 삶은 언제나 시간과 장소 안에서 완성되어졌습니다. 이천여년 전 어느 날 베틀레함 마굿간이라는 공간에 육화하심으로써 그 날과 그 시간을 하느님 사랑의 풍요로움으로 채우셨고, 나자렛의 목수의 아들로 살아가심으로써 사생활의 공간을 구체적인 삶의 장소로 변환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공생활을 통해서 잊고 지냈던 이스라엘이라는 공간을 하느님 역사가 완성되어지는 구체적인 장소가 되게 하셨습니다.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과 의식은 정주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과 의식은 부르심의 이유를 완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질을 확장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요청되는 예수의 육화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돌이가 아니라 정주의 선택을 통해서 공간을 장소로 변형시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안에서 경험되는 하느님의 풍요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람과 창조된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장소와 시간을 의식하는 행위는 멈춤을 통해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효율성이라는 깃발 아래서 정주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장소를 잃어버린 사회는 멈추지 않습니다. 시간도 사라집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장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을 잃어버린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공간 속에 육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고 듣지 못하게 됩니다.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불의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의 육화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웃의 울음소리는 거리의 소음이 됩니다.하느님의 육화는 장소와 시간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육화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를 동반자로 초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장소인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이 하느님의 육화를 완성시킵니다.임상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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