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면서 불볕더위도 한풀 꺾였다. 여전히 한낮에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청양문화원(원장 이진우) 문화유적답사 회원 40여 명은 지난 9월23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천주교도라는 죄명으로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중 10여년을 보냈던 곳을 찾았다. 다산 초당에는 다산선생이 글자를 직접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한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선생이 고된 유배생활 가운데에서도 일생의 역작을 만들던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유배생활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편집자 주강진에는 다산이 유배 기간 동안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 만든 ‘정약용 남도유배길’이 있다.우리 문화유적답사 회원들은 김규식 문화해설사(전 강진 문화원장)를 만나 축성600주년을 맞는 강진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이어 다산기념관과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사적 제107호로 지정된 다산 초당을 찾았다.다산 선생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이 초당에서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곳이다.정조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다산 정약용선생은 정조와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기도 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천주교 입교로 인해 정치적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실증주의적 학풍과 현실적 정치감각으로 인해 많은 유배생활을 했다.다산 초당가는 길, 다산이 걸어가신 유배길을 따라 문화회원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는다. 다산 초당 가는 길(일명 뿌리의 길)은 이리도 고즈넉하다. 대나무 목책이 운치를 더해준다.가족과 떨어져 홀로 걷던 길이라 생각하니 애달픈 마음에 회원들의 뒤를 따라 걸어본다. 불혹의 나이에 유배라는 이름으로 산길을 오르며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다산의 눈길이 스쳐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길섶의 모든 풀이 예사롭지 않다.茶山이란 호가 말해주듯 차를 많이 좋아했던 정약용 선생. 마당에는 넓직하고 큰 바위가 있다. 차를 마시기 위한 부엌의 용도로 쓰였다고 문화해설사가 들려준다건물은 초가가 아닌 기와지붕이다. 초당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원래 초당은 작은 초가집이 아니였을까?
마당곁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하여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 조그만 섬을 만들어 이름을 "연지 석가산"이라 붙였다고 한다.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불교적인 이름인 `연지 석가산`은 혜장선사와의 인연때문이었을까? 생각해 본다.초당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동암이 보인다. 2,000여 권의 서책을 보관하여 집필할때 자료로 사용했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할 방법 등을 저술한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동암에서 다시 오르면 보이는 천일각. 백련사 가는 길목에 있다. 백력사의 혜장선사와의 교류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고 제자였고 벗이었을 두사람의 우정은 유명하다.그러나 천일각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강진만이 보이는 이곳에서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을 그리워 하고 가족들에 대한 애닮은 마음을 삭혔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에 강진군에서 만들었다고 한다.멀리 강진앞 바다가 보인다. 그리움이라는 아픔으로 보셨을 다산의 시선으로 한참을 보게된다. 가족, 형제, 그리고 나라를...문화유적답사 회원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다산이 차를 배우러 수없이 걸었던 백련사 가는 길을 따라 밟는다. 가는 길에는 많은 야생차밭이 있다. 다산께서 백련사 가는 길에 한잎두잎 차를 따셨을 모습도 더듬어 본다.도중에 `해월루`가 있다. 사방이 훤하게 트였고,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바다 위에 뜬 달`이라는 뜻으로 지었다니 그 이름에 걸맞게 수려하다. 정말이지 팔베개하고 누우면 시 한 수가 절로 읊어 질 것만 같은 풍광이다. 다산의 주옥같은 시들 중 다수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혜장선사와 자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우정을 쌓던 곳도 바로 여기다.다산이 이 곳에 머물 때 재 넘어 있던 백련사에는 혜장이라는 뛰어난 학문의 스님이 계셔서 다산과 말벗이 되는 등 친분을 갖고 교류를 하였다. 이때 오가며 들렸던 동백숲과 야생차밭은 지금도 남아 많은 이들을 위로한다.길 좌우로는 야생차밭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백련사 동백림으로 길이 이어진다. 이 숲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련사의 처마가 동백나무 사이로 언듯 비치기 시작한다.다시 또 회원들은 웅성거린다. 소녀처럼...
혜장선사가 머물던 백련사는 고려 후기에 불교정화운동인 ‘백련결사’의 본거지였다. 대웅보전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 ‘萬德山 白蓮社’(만덕산 백련사)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절 사’(寺)가 아닌 ‘모일 사’(社)를 쓰고 있다. 맑은 법문소리가 흘러나오는 대웅보전, 대웅보전 옆 배롱나무의 자태가 다산 초당의 그것처럼 고고하게 느껴진다. 삼성각 앞뜰에 서니 사찰 건물 기와 너머로 아늑한 강진포구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조선 후기 최고 대학자인 다산과 젊은 혜장 스님이 차를 나누며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일까.다산 선생은 같이 하지 못했던 자식들에게 멀리서나마 애끓는 부정으로 서신으로나마 독려하고 정을 보여줬던 참된 아버지.다산 성생은 아내에게도 끊임없이 걱정과 애정어린 서신으로 홀로 자녀를 돋보는 처지를 가엾이 여기고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했던 듬직한 남편.그 분의 강진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과 천일각,해월루, 백련사 가는 길(일명 사색의 길과 뿌리의길)을 꼭 가족과 함께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너른 자연으로 나서면 본격적인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글.사진 이인식 청양문화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