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에 이어> 3. 정인희는 군수 직을 내려놓은 항일독립운동가 이었다.1895. 12. 3일에는 청양의병창의소를 모델로 하여 홍주에 김복한을 의병 총수로 하는 창의소를 설치하고 이승우를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나 창의소 설치 하루 만에 이승우가 변심하자 홍주부의 각 군의 관군은 모두 회군하였으나, 오직 정인희 청양군수 만이 공주에도 창의소설치 할 목적으로 진격 중 정산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정인희 청양군수는 당시 현직 군수로서 항일정신이 충만하였으며 군수 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의병활동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895년 12월 2일 홍주목사 이승우를 승복시키고 정산전투에서 패한 정인희 청양군수는 결국 그는 하루 만에 변심을 한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군수직을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1895년 12월 3일 거의 된 홍주의병의 모태가 된 것은 청양의병이다.다시 말해 청양은 홍주의병의 본향이며 당시 현직군수가 창의하여 가장 빨리 대응한 우리나라의 “의병 발상지”가 청양인 것이다.4. 정인희 항일정신이 녹아있는 “청양군” 청양은 충남의 서남부를 관할하던 금정찰방이 있어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적으로 요충지라는 점도 배제 할 수 없으나 당시 정인희 청양군수가 의병을 창의하고 선봉에 서서 많은 지원과 활동을 아끼지 않은 점도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역적분위기가 한층 높았기 때문 일 것이다.특히 청양은 의병장 민종식이 어려서 정산에서 살았던 만큼 청양이 연고지이며 34세에 이조참판의 벼슬을 내려놓고 1895년 낙향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안병찬, 채광묵, 이세영, 김덕진, 등 지역유생들의 항일정신이 의병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면암 최익현과 윤조 민종식이 청양에 둥지를 튼 것도 정인희군수가 항일운동을 하기 좋은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이처럼 청양은 예로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구국일념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의에 나서는 忠節義 서기가 깃든 곳이 바로 “청양”이다. 이는 정인희 청양군수의 창의정신이 녹아있기 때문 일 것이다.5. “의병의 발상지” “청양군” 이는 “충절의 정신”이며 “청양의 정신”이다.정인희 청양군수는 당시 어느 군수보다 구국일념의 항일운동에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그 직분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1895년 청양의병을 창의하였고, 11월 29일에는 의병 180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도착하여 12월 2일 의병에 동참할 수 없다던 홍주목사 이승우를 설득하여 의병에 참여 시킨바 있다.아울러 공주에도 창의소를 설치하기 위하여 공주로 진격 중 정산전투에서 패한 후 같은 해 12월 상순 청양군수 직을 파직(사임)당했다. 아무리 군수라라도 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활동과 지원을 한 것은 항명으로 어느 군수도 이를 주도하지 못했으며 이에 가담하지도 않았다.이와 같이 청양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항일 및 구국운동에 불을 당 긴 “의병의 발상지”로 의병을 창의한 정인희군수의 창의정신은 곧 “충절의 정신”이요 이는 바로 “청양의 정신”인 것이다.아울러 청양의병의 역사적 재평가가 시급한 실정이다.<참고문헌> 홍주의병실록(1987, 홍주의병유족회) 독립운동 공훈록(국가보훈처) 단재 정훈모전집 Ⅰ권 (2015. 정훈모 지음, 도서출판 아라)
-청양을 사랑하는 마음연구소 소장 정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