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일생은 대부분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앙이나 신념은 불안의 연속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커다란 반석이 되곤 한다.날씨가 많이 풀린 3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던졌던 이들이 영면해 있는 성지(聖址)로 순례여행을 떠나기에 한결 가벼워진 계절이다. 충남 청양지역에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새터 성지와 줄무덤 성지) 성지가 있다. 최 신부는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며 가톨릭의 참된 토착화를 위한 선각자였다. 15세 때 최방제·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부터 마카오에서 본격적인 사제수업을 받았다. 다락골 성지는 새터(다락골 입구)와 줄무덤 두 곳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새터는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탄생지이고, 줄무덤 성지는 천주교 박해 때 홍주(홍성)나 공주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다락골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추정된다. 신해박해 때 황바오로 등이 체포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모와 조부의 이주 이후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서울 거주)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그 후 최한일의 아내 경주이씨는 외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신해박해를 피해 다락골로 이주하였다.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 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신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 경기 안양의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 다락골의 다른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 혹은 체포되거나 혹은 피신했는데, 다락골 뒷산에 있는 37기의 줄무덤은 이때 목숨을 바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이도기 바오로의 순교지인 정산면 서정리 정산현청(현 청양군 정산면사무소)에도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숱한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지킨 다수의 청양지역 순교자들은 교황청이 공식 지정하는 시성시복자 반열에 올랐다.최경환(1805∼1839) 성인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복자·복녀 반열에 오른 인물로는 최경환 성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 복녀를 비롯해 이도기 바오로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 복자, 김화춘 야고보 복자, 김대권 베드로 복자, 최봉한 프란치스코 복자, 최해성 요한 복자, 최 비르지타 복녀 등이 있다.그밖에 김풍헌 토마스, 이여삼 바오로, 최신덕 바오로, 황 바오로, 최대종 요셉, 정화경 안드레아, 한재권 요셉, 박 마티아, 김 에피파노, 김영서 예로니모, 김 그레고리오 등의 순교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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